진달래꽃
김소월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은 김소월을 추천하면서 ‘민요풍의 시인’으로 평가했다. 훗날 김소월은 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마도 김소월 자신은 ‘민요풍’이라는 표현이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시의 운율을 ‘7ㆍ5조’라고 규정하며 민요풍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 ‘7ㆍ5조’는 우리 민요가 아니라 일본 민요의 운율 특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김소월은 서구 문화가 문학 영역에도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적 정서를 노래한 민족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가 이러한 민족적 정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여성 화자의 태도를 취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서정적 작품을 창작한다. 사랑, 이별, 아픔, 그리움 등이 작품의 주된 정조였다. 그러나 1922년 ‘진달래꽃’ 발표 이후 그의 작품에도 사회적 자각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옷과 밥과 자유’, ‘밭고랑 위에서’ 등의 작품에서 참여적이고 남성적인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북한 문학에서는 이러한 후기 시들을 언급하며 해방 이전 조선 문단의 민족시인으로 칭송하기도 할 정도이다.
그러나 김소월의 이러한 변화는 그의 작품 창작에 오래도록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변화가 감지될 즈음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김소월의 시를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묶었다. 먼저 《창조》지 등단 작품 세 편으로 문을 열고, 이어 2~5부에서는 각기 주제별로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고독, 고향과 가족에 관한 시들을 묶었다. 또 김소월의 작품 몇 편이 신경향파(사회주의 문학 전단계)적이라는 데에 학계의 전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데, 6부에서는 엮은이의 판단에 따라 김소월의 신경향파적 작품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묶었고, 마지막으로 스승 조만식에 대한 시 등 두 편으로 문을 닫았다.